31-6. 인간
# 명성을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행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잃는 데는 단 하나의 악행이면 충분하다."
(벤자민 프랭클린)
예의바른 사람의 경우 다른 사람의 예의바르지 않음을 부각시키게 되므로 주위 사람들은 마음이 불편할 수 있다.
이에 예의바른 사람이 오히려 배척되고 미움을 받는 경우도 있다.
예의바른 사람은 이러한 점도 고려하면서 처신하여야 한다.
예의바르지 못한 사람과 섞여 사는 것에 감사하라.
자신처럼 출중하지 않은 인격으로도 그다지 비난받지 않고 사는 것은 그러한 사람들 덕분이다.
예의바른 사람은 나약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강하다.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예의바른 사람에 대한 지지자가 주위에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 예의바른 사람은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자기 자신의 감정을 극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의바른 사람을 항상 주시하고 존경한다.
예의바른 사람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은 단견이다.
그렇게 믿고싶다.
큰 일은 통상적인 인간을 자극하지 않는다.
성인군자에게만 적용되는 용어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상적인 인간은 극히 작은 일에 인생을 낭비한다.
인간은 각자 특수성이 있다.
따라서 도덕적 기준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면 일부 사람들은 지나친 구속으로 느껴 괴로움을 느낀다.
도덕적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기준도 동일하다.
사회가 존립하려면 일률적 기준이 필요하지만, 각자의 특수성을 고려하여야 한다.
만일 어떤 사회가 설정한 기준으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괴로움을 느낀다면,
그 사회를 이탈하는 것이 자신과 사회를 위해서 좋을 것이다.
# 일반적으로 칼럼은 인간을 포함한 사회의 갖가지 실태를 바라보며 이에 대한 비판에 집중한다.
그 비판의 기준점은 아주 고상한 인간과 그러한 인간으로 이루진 이상적인 사회다.
그러나 그 기준점은 이상론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한 기준점과 비교하며 타인이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위선적일 수 있다.
실제적인 인간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부족한 점이 상당히 많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이러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나 국가도 동일하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이나 사회의 실태를 아무리 비판해도 그러한 상황은 계속 되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실태를 비판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개선하기 위한 아주 장기간에 걸친 인문학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성이 개선될 때까지는, 인간이 그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상당히 사악한 행위까지 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제도를 완비하려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제도에 위배되는 행위가 발생되는 경우, 이에 대한 위선적 비판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러한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의 보완에 더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내면적 생활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과 다른 남의 생각 속에 사는 가공의 자신을 추구하며, 억지로 자기와 다른 것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끊임없이 그 가공의 자신을 장식하느라 실제의 자신은 소홀히 한다."
(파스칼)
인간은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즉 자책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것이 자기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좌절하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매일 나 자신을 바라본다.
인간과 인생을 바라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옮기면서 삶에 보람을 느낀다.
나 자신과 더 나아가 인간 본성의 개선에 아주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괴테는 술회하였다.
이는 인간의 완전을 지향하는 끊임 없는 노력과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한 좌절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실수를 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은 실수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한계다.
실수를 할 때마다 원망하고 자책한다면 평화로운 삶이 유지될 수 없다.
실수를 용인할 일이다.
내가 실수를 할 수 있듯이 타인도 실수를 할 수 있다.
이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첫걸음이고, 평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실수는 자신의 오만을 방지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신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실수를 통하여 성장한다.
''우리는 모두 타인 속에 자기의 죄악과 단점과 여러가지 나쁜 습관을 똑똑히 비추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거울 속에 보이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개라 생각하고 거울을 향해 짖어대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사람들은 벽거울은 열심히 보면서 마음거울은 보려하지 않는다.
이는 마음거울이 아니라 벽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태가 반영된 것이다.
이에 마음거울을 보는 시력을 상실하였고, 마음거울 자체도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벽거울에는 육체가, 마음의 거울에는 영혼이 비추인다.
쇼펜하우어의 위 말은 타인의 마음거울이 공정하고 자신의 마음거울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 전제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거울은 대부분 공정하지 않다.
이기심, 질투, 선천적 후천적 변형 등으로 찌그러지고 혼탁해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은 마음거울을 찾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타인의 마음거울이 공정한지 여부는 자신의 마음거울을 통하여야 알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마음거울이 찌그러지고 혼탁해져 그러한 사람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조석으로 변하는 등 변화무쌍 하다.
매일 자신의 마음거울이 청정하도록 관리해야 한다.
다행히 고전에는 선지자들의 고귀한 마음거울이 보존되어 있다.
매일 고전의 마음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거울을 청정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사람들 각자의 의무이다.
서로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비추어 볼 수 있도록.
"설사 그것이 우리에게 따뜻한 손에 의해 주어지든 차가운 손에 의해 주어지든,
인생의 한 순간 한 순간을 가능한 한 최상의 것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의 예술이며, 이성적 존재자의 진정한 특권이다."
(리히텐베르크)
#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대로 하여도(從心) 어긋나지 않는다" (공자)
70세를 종심이라 일컫는다.
위 나이에 이른 나는 아직 부족하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대로 한다면 불행이다.
언제 그러한 상태에 이를 것인가.
종심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인생의 과업일 수 있다..
(2025.4.23.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