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글
# 좋은 책은 영감을 통하여 글을 탄생시킨다.
육체는 유전자를 통하여, 영혼은 책을 통하여 생명을 이어간다.
인터넷을 뒤적이면 수만 내지 수십만명의 독자가 있는 블로그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 내지 감각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글을 쓸 능력 뿐 아니라 의사도 없다.
상품성이 없는 상품을 생산하는 회사는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 오늘도 그러한 상품을 생산한다.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려면 우선 생각하는 부분을 정리하여 글로 남겨야 한다.
이로써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이것을 기초로 많은 세월에 걸쳐 그 위에 계속 정신적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건물은 결국 완성되지 못한다.
문명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탄생한 것이라 생각한다.
글은 과학의 한계에 얽매임 없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가 그 예이다.
미래에는 상상이 실현되기도 한다.
그렇게 실현된 상상이 많다.
너무 현실적 한계에 얽매이면 발전이 어렵다.
현실은 편견으로 견고하게 구축되었고, 이를 극복하려면 저항이 심대하다.
글로 기록해 놓지 않은 삶은 결국 잃어버린 삶이다.
망각과 죽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뛰어난 생각이 이렇게 사라지면 허망하다.
그리고 너무 이기적이다.
글을 쓰는 것은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글을 구상하고 다듬는 과정은 고도의 집중을 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확의 기쁨이 있다.
정신의 밭에서 정성껏 키운 지혜를 수확하는 것이다.
항상 백지를 앞에 놓고 현재를, 그리고 오늘을 글로 정착시키자.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하얀 백지에 저장하자.
훗날 글을 더듬으면 지나가 버린 시간들이 다시 되살아날 것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도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해결되는 경우도 있다.
괴로울 때는 그 마음을 하얀 백지에 쏟아 놓아라.
그러면 일정 부분 괴로움에서 해방될 것이다.
#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수많은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은 시간과 인생의 낭비다.
그러한 책들이 많다.
가능하면 간단명료하게 작성할 일이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상념은 즉시 글로 묶어두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머릿속은 하도 복잡하고 신출귀몰하여 어떤 생각이 문득 나타났다가 즉시 숨어버린다.
숨은 곳이 어딘지 찾을 수도 없다.
언제 그 생각이 다시 나타날 것인지, 아니면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인지 알 수도 없다.
어느 순간의 나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고 하여도 이는 '나'라는 존재의 피상적 모습에 불과하다.
어느 순간의 생각을 글로 표출하면 '나'라는 정신적 존재가 화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체는 영혼의 아바타다.
자기 자신의 육체가 세상을 하직한다 하더라도 영혼은 글을 통하여 영원히 살아있게 된다.
물론 이것은 영혼의 존재를 공감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현대문명은 육체에 비하여 영혼을 너무 저평가한다.
이로써 사회의 품위가 저하된다.
글은 언제든 추억이나 과거로 더듬거리며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지도다.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며 되살아나는 과거를 어렴풋이 또는 명확히 느낀다.
타인이 쓴 글을 읽으며 타인의 경험과 정신을 공유한다.
이것이 정신의 세계다.
정신의 세계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현실성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세계도 정신을 통하여서만 의미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실세계도 추상적인 세계라 할 것인가.
과거나 미래는 추상적인 세계다.
극히 순간적인 현재를 매개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는 현재의 정신으로 끌어올려져 생동하는 현재에 편입된다.
광대한 우주도 동일하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신도 동일하다.
행동과 경험 없이 책상에 앉아 머리를 짜내어 쓴 글은 생명력이 없다.
좋은 글을 쓰기를 원하면 먼저 행동하고 경험하라.
독서를 통하여 간접경험이라도 하라.
이런 의미에서 글은 육체와 정신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글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써야 한다.
너무 힘이 들어가면 읽기에도 힘이 든다.
너무 현학적으로 쓰려 하면 가식이 스며들 가능성이 많다.
글은 이를 쓰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숙성된 것만 표출해야 한다.
단시간에 써내려간 글은 대개 생명력이 없을 뿐 아니라 정신과 환경을 오염시킨다.
글을 너무 쉽게 쓰면 대부분 가치가 없고, 너무 힘들여 쓰려고 하면 결국 아무 것도 쓰지 못하고 인생을 하직하게 된다.
중용을 지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의 명상록을 자주 읽는다.
나의 글에도 그의 글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내가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면, 감히 그와 같은 삶을 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험난한 인생길에서 실제로 철학을 실천하였다고 생각된다.
그의 글은 실천의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글은 희망의 기록인 경우가 많다.
사후에 반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며 비로소 글의 진의를 깨닫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진의는 글의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듯하다.
이러한 때 나의 가슴에 행복이 살며시 스며든다.
마치 따스한 봄바람처럼.
이러한 때, 나의 글도 누구에겐가 이러한 행복을 선사하면 좋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욕심은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병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