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라필 2024. 10. 25. 22:20

# 매일 현인들의 글과 사색을 통해 나의 정신을 벼린다.
이러한 정신으로 인생의 진수를 끊임없이 조각한다.


이를 통해 일생에 걸쳐 부끄럽지 않은 글 몇 점쯤 남기고 싶다.
이러한 욕심만은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병이라 생각되는 때도 있다.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써지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때도 많다.
글재주가 없는 경우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의미있는 글 한 줄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반면 어떤 때는 길을 걷다가, 혹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다가 문득 글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이는 무의식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간구하는 자에 대한 신의 은총이나 계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이 어디서 오는지 명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사라지기도 한다.
머리에 떠올랐을 때 속히 붙잡아 백지에 옮겨 놓아야 한다.
이를 소홀히 하여 한번 사라지면 머릿속을 샅샅이 뒤져도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기억력이 예전과 같지 않은 요즈음은 더욱 그러하다.
 
글을 쓰는 이유는, 인생을 좀 더 현명하게 직시하고자 하는 바램 때문이다.
왜 사는가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숙제다.
수많은 인생의 역경을 극복하며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


수시로 변경되는 인생에 대한 시각을 가능하면 좀 더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보고자 하는 바램에 의해서도 글을 쓴다.
어쩌면 인생무상이란 상념에서 탈출하고픈 마음일 수도 있다.
글을 쓰는 동안은 지극히 행복하다.
삶에 의미가 더해지는 느낌이 든다.
 
글은 독서를 하거나 매일 인생길에서 겪은 일들로 인한 정신적 고뇌의 결실이다.
독서를 하거나 사건이 지나면 깨달음이 남는다.
그 때마다 글이 탄생한다.
아니 글이 탄생하도록 노력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허탈하기 때문이다.
글은 지나간 시간들이 깨끗이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고, 영혼이 의미있게 존재한 시간이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사진은 육체의 존재 근거에 불과하다.
 
의미있는 글의 탄생이 정신적 육체적 이유로 정지되면 한없이 슬플 것이다.
그러한 날 나의 존재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한 점 아쉬움 없이 행복하게 하늘나라로 떠나고 싶다.
그 날 인생이 아름답게 보이기를!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만 쓰려고 하면 너무 긴장하게 되어 글을 제대로 쓸 수 없다.
따라서 일단 글을 쓰고 그 중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을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글의 선별 요건은 엄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시간, 즉 인생을 낭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맛이나 향기를 문장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추상적으로, 혹은 다른 맛이나 향기와 비교하여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감각과 관련된 부분은 대부분 이와 동일하다.
표현의 한계다.
그러나 실체가 존재하는 것만은 명백하다.

이 세상을 자세히 관찰하면 흥미롭지 않은 부분이 없다.
이를 관찰하고 정리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아무나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인생의 낭비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환경에서 특수한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경험들은 각자 타인과 다른 사고체계에서 독특한 생각들을 잉태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마치 기자처럼 글로 정착시켜 보존하고, 타인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람들 각자는 일종의 사관이다.
특히 삶의 혹독한 경험에서 탄생한 글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인도하는 등불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이 원하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 노예로 전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침묵할 일이다.
군중의 환호에 연연하면 글의 생명이 짧다.

좋은 노래를 부르려면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하듯 좋은 글을 쓰려면 끊임없이 독서와 사색으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글은 손가락이다.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
글을 수없이 읽으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보인다.
처음은 희미하다가 차츰 명확하게 보인다.
글은 이러한 역할을 하여야 한다.
 
#  글에는 인격이나 인품의 향기가 스며든다.
좋은 향기를 바란다면 인격도야에 힘쓸 일이다.
이를 소홀히 하면 글에 인공적 향기가 스미어 단명하게 된다.

고전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 은은한 향기가 난다.
많은 세월이 더 흘러도 이러한 향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향기는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글에도 고전의 향기가 스며들 것이다.
일종의 정신적 출산행위다.
 
글이 완성되면 오랜 시간 숙성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설익은 냄새가 난다.
요즈음 글을 너무 속성으로 뽑아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숙성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오히려 신의 은총이라 할 수 있다.
숙성된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국가는 번성할 것이다.

''짜라투스트라여, 그대의 과일은 익었으나 그대는 이에 어울릴만큼 익지 못했구나. 다시 고독 속으로 돌아가라. 더 무르익도록!''
벗으로부터 이 소리를 듣고 그는 통곡하며 고독 속으로 들어갔다.

글이나 말은 실천의 기록이 아니라 실천을 다짐하는 절규다.
일종의 반성문일 수도 있다.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절규는 내세를 향해 떠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시지프스처럼 그 무거운 바위를 드높은 산의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행위 그 자체로서 행복을 느낀다.
정상에 이르러 그것이 다시 무서운 굉음을 울리며 절벽 아래로 구른다 하여도, 설사 정상에 이르지도 못한다고 하여도!
이러한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