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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행복

주라필 2024. 10. 28. 18:46

# ''행복은 일시적이고, 두가지 슬픔 사이의 간격이다.

즐거움은 단지 고통의 부재일 뿐이며, 진정한 행복은 그 너머에 있다.'' (쇼펜하우어)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바란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하기는 어렵다.
역사상 수많은 현인들이 정의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각인각색일 뿐 아니라 어느 하나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행복 자체가 추상적인 개념이고, 다분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원하는 사람 자신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확정짓기 어렵다.
그래서 행복에의 길에서 수없이 길을 잃고 방황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행복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행복이라 여겨지던 것이 마치 신기루처럼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또다른 행복을 찾아 걷게 되지만 이것도  또다시 사라진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몇 번 겪다 보면 인생의 막이 내리는 것이다.

행복은 사람들 각자가 원하는 것이 충족되어 만족한 상태라고 일응 정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가는 과정이 행복이다.''(로버트 프로스트)

그런데 원하는 것이 사람마다 각기 다를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변한다.
욕심의 변화 때문이다.
변화할 뿐 아니라 증폭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욕심이 충족되어 만족하는 것도 잠시이고, 순식간에 욕심이 커진다.

욕심은 감성의 영역이므로 이성의 통제가 어렵다.
일단 욕심이 마음을 뒤덮으면 이성은 그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렇게 욕심의 그릇이 커지고 이를 충족시킬 수 없으면 불행에 휩싸인다.
따라서 이 세상에 행복과 불행이 끊임없이 교차하게 되는 것이다.

행복이 계속되면 이를 느끼거나 만족하지 못한다.
행복이 지나가야 회상하며 아쉬워한다.

친구들과 뛰놀던 어린시절, 미래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학창시절, 군에 입대하여 건강하고 힘차게 훈련하던 젊은 시절, 사랑하고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 등은 얼마나 행복한 시간들인가.

이를 그 시절에 깨달았다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것인가.
그러나 대부분의 행복은 정작 그 시절에는 느끼지 못하고,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뒤돌아보며 아쉬워한다.
그래서 신은 행복들 사이에 불행을 끼워넣어 행복을 깨닫게 하는 수고를 하는 것인가.

행복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일종의 욕심이다.
불행에 너무 낙담하는 것도 단견이다.
행복과 불행은 서로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것이다.
마치 밤낮이나 계절이 돌고 돌듯이.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모든 인간의 운명인 것을.


# 행복은 주관적이다.
이 세상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하다.
거의 동일한 환경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불행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가능하면 행복한 시각으로 바라볼 일이다.

언행의 변화가 그러한 시각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가능하면 인생에 대한 긍정적 언행을 할 일이다.
긍정적 언행에 긍정적 생각이 깃든다.

주관적이라는 것은 각인각색이라 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이를 객관화하려 노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객관화의 척도로 소위 성공이라는 잣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재산, 권력, 명예를 중요한 성공표지로 삼았다.
이러한 것들을 얼마나 취득하였느냐에 따라 행복한 자인지 여부를 판가름하자는 것이다.

주로 성공자들이 이러한 공식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구분지워 일종의 귀족으로서의, 행복한 자로서의 평가를 받고싶은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에 따라 행복에의 길은 비좁고 경쟁이 치열해지게 되었으며, 길 옆은 천길 낭떠러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길을 지나가려고 서로 밀치고 짓밟는다.

무엇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길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가.
행복하게 살던 사람도 이러한 잣대를 드리대면 왜 초라하고 불행해져야 하는가.

행복은 주관적이므로 사람들 각자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길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가 인정해 주는 행복을 추구하며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여야 하는가.

심지어 재산 명예 권력이 인생의 목적인 사람들이 있다.
행복을 위한 수단이 목적화된 것이다.
언제 행복할 것인가.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에의 수단이 타인의 행복을 저해하는 것이라면 결국 불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수단은 외면적이므로 사회가 용인하는 한계 내의 것이어야 한다.

행복한 인생은 매일의 행복의 총합이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희생한다는 자세로는 행복한 인생은 보장되지 않는다.

나는 평생 하루도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행복한 놀이였다.(에디슨)
얻은 것은 이미 끝난 것이다. 기쁨의 본질은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셰익스피어)

# 극도의 고난을 겪은 후에야 평범한 삶이 곧 행복임을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찾아 헤매면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
결국 그러한 행복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평범한 자기의 삶에서 행복을 가꾸어 갈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행복의 양과 불행의 양은 거의 비슷할 것이다.
행복해야 얼마나 행복하고 불행해야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부분을 보고 행복해 한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부분을 보고 불행해 한다.

그러나 이는 운명이라 할 수도 있다.
인간이 이러한 것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어느 정도는 변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시각을 변경시키려면 인문학, 특히 철학에 심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경시하면 행복한 상황에서도 불행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것은 치유하기 어려운 질병이다.
이는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의 창조자다.(소로우)

지나치게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아직 철학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지나치게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창조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오늘도 행복과 불행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돌고 돈다.
마치 회전목마를 타듯 즐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