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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 선악

주라필 2024. 11. 1. 06:09

#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며,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거울이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거울을 아끼지 않으면, 비록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니, 이것을 요묘(도에 이르는 심오한 이치)라 한다.(노자)

이 세상에는 심성이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다.
현실적으로는 대부분 선과 악 사이에 분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은 모든 사람 내부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의 문제다.

선은 종교와 정상적 인간의 지향점이다.

문제는 그러한 심성은 거의 선천적이라는 점이다.
환경적 영향도 있겠지만 이는 미미한 것 같다.
더구나 생활환경도 부모와 관련하여 거의 주어진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부모를 스스로 선택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결국 선악은 거의 신에 의해 부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 각자가 자신의 심성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하였다는 자유의지도 공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유의지라는 용어는 인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개념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심성이 선한 자는 무조건 추앙하고 악한 자는 무조건 미워하는 것이 정당한가.

사람의 육체는 잘 생긴 사람과 못 생긴 사람이 있다.
이 경우 못 생긴 것을 그 사람의 책임으로 돌려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심성에 관해서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정당한가.
자신의 책임도 아닌 심성을 이유로 평생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며 살기 때문이다.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악한 사람에 대해서도 신뢰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악에 대한 최후의 방파제일 수 있다.
신뢰를 잃었다고 생각할 때 악의 방파제는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더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도 마음 한 구석에는 명예심, 즉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싶은 마음이 남아있다.
악한 행동의 뿌리도 그릇된 명예심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명예심은 타인의 평가를 전제한다.
명예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악을 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악에 악으로 대응하면 악을 근절하기 어렵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와 현실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손이 다치지 않았을 때는 뱀독에 닿아도 아무 탈이 없다.

스스로 악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악도 아무런 해가 없다."

(부처의 잠언)

 

이 세상에 악한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간이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다.
악한 사람도 존재이유가 있기에 신이 창조를 하였을 것이다.
선한 사람과 같이.

선과 악을 판별할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공정한 판단자도 정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지극히 선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선악은 불확정 개념이다.

악을 행하면서 자기 자신은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어찌할 것인가.

자신이 행하는 악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어찌할 것인가. 
악을 근절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아주 흔한, 그리고 아주 큰 불행으로 이끄는 유혹의 하나는, '다들 그렇게 한다' 라는 말로 표현되는 유혹이다."

(톨스토이)

#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지만 선량함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없다."  (루소)

" 악과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한 비난은 악을 증대시킬 뿐이다." (류시 말로리) 

 

의뢰인의을 말에 의하면 소송 상대방은 대부분 악마다.
세상에 그렇게 사악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그를 도와주는 변호사도 같은 부류라고 입에 거품을 물며 거듭 되뇌인다.
아마 소송 상대방도 의뢰인과 나에 대하여 동일하게 반응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시각에 의하면 법원에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악마라고 불리워지는 족속들이라 할 수 있다.

의뢰인은 소송 상대방의 실체에서 좋은 점들은 버리고 미운 점들만 고른 다음 악마의 틀에 부어 형상화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창조한 악마에게 갖가지 분노를 쏟아 붇는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그림자와 싸우는 것이다.

의견이나 이해관계가 다른 경우, 사회 곳곳에서 동일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요즈음의 정치현실을 보면 암담하다.
불행한 일이다.

#  "악에 대한 두려움은 선에 대한 전망보다 인간 행동의 훨씬 강한 원리다."

(존 로크)

 

선행이 타인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심리적 고문이 될 수도 있다.
질투하는 사람도 있게 된다.
인간이 모두 선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친 예의는 위선일 수도 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선행이 적선으로 비쳐진다.
거지가 아닌 사람에게 적선은 무례다.
선행을 할 때 고려하여야 할 점이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선행은 지속되기 어렵다.
인간은 대부분 나약하고, 선행의 철학적 기초가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신과의 관계를 전제한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 관계에서도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선행을 하려는 사람은 더욱 자신을 성찰하여야 한다.

참다운 선행은 이 세상을 떠돌며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킨다.

예지의 역할은 선과 악을 간파하되 그 근원이 인간의 책임범위 밖의 문제임을 깨닫는 데 있다.
이를 깨달으면 요즘같이 험난한 시국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 "잘못된 수치심은 악마가 즐겨 쓰는 무기다.

잘못된 교만으로서는 그저 악을 부추길 뿐이지만, 잘못된 수치심으로는 선을 저지할 수 있다."

(존 러스킨)

 

젊은 시절 사법시험에 거듭 실패하면서 이를 포기하고 선물가게를 운영하려던 때가 있었다.
선물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뿐만 아니라 파는 사람까지 모두 행복하리라 생각되었다.
특히 선물을 파는 사람은 어떠한 선물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아주 행복하리라 생각되었다.
선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정신적이거나 영혼적인 것이 부가된 것이라고도 생각되었다.
행복을 기준으로 하자면 이 세상에 그렇게 좋은 직업은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주위의 만류로 생각만으로 끝나게 되었다.
어쩌면 일종의 현실도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타인의 분쟁에 휩싸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서류를 작성할 때마다, 의뢰인의 소송상대방에 대한 미운 감정이 나의 마음에도 이입될 때마다, 문득 선물가게를 꿈꾸며 행복에 잠기던 그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나의 성격을 고려할 때 그러한 삶이 더 행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인간은 불행한 존재다.
악인은 정신이 질병에 걸린 상태다.
악인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사회의 운명이라면 이들을 포용하여 인간사회의 일원으로서 복귀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문명사회의 의무다.
그러나 그러한 문명사회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악인을 미워하고 처벌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악한 사람이라고 깨닫는 사람은 이미 사악한 사람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도덕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하다.
완전한 도덕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현실성이 없다.
실현되기 어렵다.
단 두 명만 모여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다르다.
그나마 사회가 품위를 유지하는 것은 명예심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사회는 인간들의 본성보다는 상당히 품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도덕이 절대적 도덕에 접근하려면 상당기간 문명사회가 지속되어 인간의 본성 또는 유전자가 변경되어야 할 것이다.

항상 선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선만이 궁극적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선은 승리할 의무가 있다.
선이 패배한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법을 불신하는 것을 넘어 신을 불신하는 데까지 이른다.
사회 구성원들은 선이 승리하도록 협조할 의무가 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는 모든 양들을 의심받게 만든다. 이중으로 피해를 주는 것이다.

선인과 악인의 차이는 크지 않다.
인간은 모두 선과 악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데 평가자 자신의 가치관이나 편견 등이 작용하여 선인 또는 악인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누구나 마음 속 깊은 곳에 악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발현되지 않은 것은 신의 은총으로 발현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죄를 지은 자는 그러한 기회가 주어진 자일 뿐이다.
죄인에 대한 지나친 비난은 오만이나 위선일 수도있다.

악마는 돈 권력 명예를 미끼로 그 의지를 관철한다.

도덕적이지 않은 정치인들이 국민을 훈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불편하다.
이러한 사람들을 인간적으로는 미워해서는 안되지만 국민을 훈계할 수 있는 지도자의 지위에 오르도록 해서는 안된다.

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성자다.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현자다.
많은 사람들은 선을 지향하는 것조차 잊고 산다.

걸맞지 않은 명예는 위선을 부추긴다.
명예에 걸맞는 선이 부족하므로 부족한 부분을 위선으로나마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는 걸맞지 않은 명예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본인 뿐 아니라 사회나 국가로서도 불행한 일이다.


#  ''젊어서도 속세와는 맞지 않고
성품은 산을 사랑하였네
속세에 빠져
삼십 년이 가버렸네''  (도연명)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톨스토이)

 

"총명하고 선량한 사람일수록 사람들 속에 있는 선을 알아본다."   (파스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