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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시간

주라필 2024. 11. 2. 17:46

#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일 새로 태어난다."  (생텍쥐베리)

 

정처 없이 인생길을 걷다가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또 한해가 슬며시 꼬리를 감추고 있다.
상당히 많이 본 모습이지만 영원히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은 유한하다.

이미 힘을 잃은 석양은 검붉은 빛을 남기며 서산으로 기운다.
검은 나목들은 묵묵히 숙명을 감내하고 있다.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간다.
모처럼 경건하다.

''오늘도 시간이라는 준마는 영혼의 채찍을 맞으며 운명의 마차를 끈다.
굳게 고삐를 물고 이리저리 자갈과 절벽을 피하며 돌진한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괴테, 시와 진실)

모든 변화는 시간을 전제한다.
순간적인 변화도 동일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현존하는 것 중 어떠한 변화도 없는 것은 상정하기 어렵다.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존재한다.

이른 새벽 거실의 시계소리가 묵직하게 울린다.
운명의 발자국 소리.
쉬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고 끊임없이 인간을 이끌어 간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슬며시 지나가는 소리들을 흘려들었던가.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무덤이 상당히 가까워져 있음을 느낀다.
인생이 허무하게 흘러갔음을 느낀다.

매일 아침 신으로부터 하루를 선물받는다.
선물인 이유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여명을 바라보며 선물에 감사한다.
사람마다 선물은 아주 공평하다.
그러나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아주 달라진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신은 시간을 슬며시 회수해 간다.

시간은 외길이다.
어떠한 행위도 동시에 함께 지나갈 수는 없다.
어떠한 행위가 지나가면 다른 행위는 멈출 수밖에 없고, 멈추지 않으면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평생 선택의 고통에 직면하게 되고, 어떠한 선택을 하는지 여부에 따라 인생의 모습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의 문제이지만, 선택능력의 불평등과 이로 인한 행복의 불평등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  "현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무한한 접점이다.

바로 그 곳, 시간이 없는 한 점에서 인간의 진정한 생활이 영위되고 있다."  (톨스토이)

 

오늘이라는 시간을 의미있고 아름다운 행위에 사용하고 이를 추억에 고이 간직하자.
노년에 하나씩 꺼내어 반추하다가 만족스럽게 내세로 떠나자.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생일지도 모른다.
내세를 위한 최상의 보장책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지 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인생의 공허를 어떻게 극복하랴.
보이지도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어떻게 극복하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현재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추상적인 시간이고 사실상 신의 영역에 속한다.
과거에 대하여 너무 후회하거나 미래에 대하여 걱정하며 현재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고, 일종의 현실도피다.

과거는 책과 같다.
잘 활용하면 도움이 되지만 너무 오래 머물면 인생이 낭비된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 속에서 살 수는 없다." (존슨)


과거도 하나의 세계다.
아주 견고하여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지만, 현재에도 수시로 수없이 재생되어 기쁨과 슬픔, 자랑과 부끄러움을 주고, 현재와 미래의 이정표가 된다.
신조차도 변화시키거나 피할 수 없는 세계다.
이것이 정의다.

과거에서 벗어나려 해도 소용이 없다.
이미 피와 영혼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내세에 가서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레테의 강물을 흠뻑 마신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나는 과거의 결실로서 정체성의 근원이다.
과거의 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날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

시간과 공간에 애틋한 정을 혼합한 시다.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 이 시간에도 그대로 전해져 애틋한 정이 절절히 느껴진다.
황진이는 문학를 통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