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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죽음

주라필 2024. 11. 17. 14:18

#  삶의 근원이 영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모든 위험의 밖에 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감성의 문을 닫을 때도 그는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노자)

 

나는 영혼의 존재와 그 영원성을 믿고 있다고 거듭 말을 하여 왔다.

그런데 하늘나라로 떠나는 어머니를 배웅하며 그러한 믿음의 진실성을 되새겨 보게 된다.

그러한 믿음이 확고하다면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런데 조용한 시간에 갑자기 울적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그렇게 믿고 싶은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노자는 '삶의 근원이 영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일까.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감히 '알고 있는 사람'일까.

그러한 사람을 본 사실이 있을까.

 

어머니를 배웅하면서 노스님과 대화를 하였다.

스님은 "인간은 모두 전생이나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한 세상에 대해서는 크게 깨달은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한다" 고 하였다.

평생 수도를 한 스님도 부처님에 의지해서만 그러한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따라서 나의 경우 영혼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싶다.

이러한 믿음을 확고하게 할 철학적 노력을 계속하고 싶다.

이 나이에 이르러 종교적 노력은 쉽지 않은 일이다.

 

# 무릇 산 자는 모두 죽음을 경건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신으로부터 생명을 선사받은 자의 피하지 못할 운명이자 예의다.
이에 저항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선하고 경건하게 살아온 경우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존재를 무의미하거나 비참하게 사멸시키는 것이 신의 의지일 수는 없다.
비록 그렇게 느껴지는 경우에도 신의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내세의 존재를 믿는다면 죽음은 축하할 일이다.
본향에 입성하는 것이 아닌가.

죽음은 오히려 진정한 삶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일 수도 있다.

삶이 진정한 죽음인지, 죽음이 진정한 삶인지 감히 누가 알겠는가.

악하게 살아온 경우도 그러하다.
인간은 거의 창조된 대로 사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창조에 관여하지 않은' 창조물을 선악을 이유로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선악에 따라 창조물을 천국이나 지옥에 보내는 기준은 공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능력, 인간성, 가정환경 등 불평등한 점이 많다.
이러한 상태는 탄생하는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운명적인 상황에 따라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결과를, 일정한 기준하에 죽음의 세계에까지 연결지으려는 시도는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 "이러한 인물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만 로마 국민에게 운을 주기로 동의하다니,

신들의 이 부정의는 웬 말인가."

(키케로)

 

죽음의 방식은 가지각색이다.
정상적으로는 그 방식이나 시기를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다.
자연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질병이나 사고에 의한 경우도 있다.
모두가 신의 뜻이자 운명이다.

사고사의 경우 책임공방을 하며 분노한다.
그러나 인과관계를 확장하면 분노하는 사람도 그 사망에  무관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조금씩 영향을 미쳐 사고사에 이른 것이다.
자기 자신이 인과관계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없었을 수도 있다.
곰곰히 생각하면 모든 세상사가 신의 뜻이자 운명이다.

죽음에의 길을 의연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살아있는 동안 삶과 죽음의 철학을 공고히 할 일이다.
이것이 철학의 진수이자 인생의 의미일 수 있다.

이를 실천한 대표적인 철학자가 소크라테스다.
그는 진리를 위해 살다가 독약을 마시고 마치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죽음에의 길로 떠났다.
진리의 세계나 내세를 확신한 자의 의연함이다.

노쇠하면 죽음의 세계로 가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큰 축복이다.
그 상태로 너무 길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커다란 불행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생각이 육체적 노화에 발을 맞추지 못하면 불행이 심화된다.

 

"나는 3막밖에 연출하지 못했어요. "

" 좋다. 그러나 인생은 3막까지만으로도 하나의 완성된 연극이다.

언제 연극을 끝낼 것인가 결정하는 존재는, 일찌기 이 연극을 구상했다가 지금은 중단하는 존재다.

당신은 연극의 구성이나 완료에 대해 책임이 없다.

따라서 흡족한 마음으로 떠나라. "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


#  "진정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 밖에 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의 현상을 바꿀 수 있을 뿐, 결코 생명 자체를 멸망시킬 수 없다."

(톨스토이)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혐오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당당히 대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죽음을 모르면 삶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신이 죽음을 부여한 것이 아닐까.

죽음 그 자체는 간단하다.
그 과정이 어둡고 두려운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극복할 수 있다면 현세의 어떠한 고난에도 자유스러울 것이다.
죽음이라는 아주 믿음직한 도피처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랴.

인간이 영생을 한다면 모두 나태해질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인생과 시간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게으름의 유혹은 죽음의 유혹과 그 근원이 같다.


캄캄한 죽음이 배경으로 되지 않으면 현존은 그 형상이 뚜렷하지 않고 가치가 거의 없다.
생명체는 죽음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은 영원하고 생명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기쁨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삶이 괴로울 때 죽음으로 도피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삶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투쟁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혼란스러운 것을 각오하여야 한다.
역경이나 혼란이 없는 완전한 평온을 원하는 사람이 갈 곳은 한 곳 - 무덤 뿐이다.
역경이 없다면 한없이 계속되는 권태의 늪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죽음으로 통하는 문은 아주 가까이에, 그리고 곳곳에 있다.
그러나 안개에 휩싸여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의 문 바로 앞에서도 마치 생명이 영원할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음의 문이 보인다면 모두 거의 죽은 목숨처럼 살아갈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평균연령으로 따지면 죽음의 문까지의 거리를 대충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자기 자신의 경우에는 예외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애써 죽음과의 거리를 멀리 잡으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하늘나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따금 '나의 생명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자문해 보라.
더 절박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죽음은 시간을 소중하게 한다.
매일 작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의미없는 상태 이전에 이러한 삶을 종식시킬 수 있는 의식이 먼저 상실되는 것이 가장 불행한 상태다.
이 경우 끌려가는 것이라는 의식조차 없이 끌려가는 것이다.
대부분 이러한 상태로 죽음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죽음으로 회피할 때는 최소한 삶과 죽음의 철학을 확고히 한 이후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패배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이 확고하지 않다면 삶과 처절한 싸움을 할 일이다.
패배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현자는 죽음보다 삶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스피노자)

행복한 죽음은 행복한 삶이 전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