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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행복

주라필 2024. 11. 26. 10:22

#  "과거에 살면 우울하고, 미래에 살면 불안하며, 현재에 살면 편안하다."  (노자)
미래를 향하여 걷되, 오늘 하루 걸어야 할 거리를 최선을 다해 걷자.

이에 만족하는 삶이 바람직하다.

행복은 만족한 상태에서 온다.
원하는 것이 많으면 만족할 수 없고 행복할 수도 없다.
풍족한 나라에서보다는 어려운 나라에서 행복한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원하는 것이 적고 만족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에 만족하고 아쉬움이나 원망이 없다면 행복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총명하지 않은 사람이 더 행복한 것 같다.
총명하면 상대적으로 욕심이 많고, 세상이 반드시 총명한 순으로 성공하거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객관적으로는 행복할만한 상황에서도 주관적으로는 불행을 느낀다.
이 경우 행복에 관한 한 실제로는 총명하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엔가 심취하지 않고서는 인생이 무상하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오기 어렵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행복하기 어렵다. 
인생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모두 채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심취하는 일이 이왕이면 보람된 일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인생이 그리 길지 않기에.

행복하기 위해 반드시 경제적 풍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끝없는 발전보다는 오히려 지나친 부의 편중현상을 개선하는 것이 행복의 총량을 증가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정한 정도의 발전이 없는 분배는 부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한다.
발전과 적정한 분배는 인류가 풀어야 할 고차방정식이다.

천국은 마음에 있다.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천국에 가서도 그곳을 천국이라 생각지 않으면 천국이 아니고 행복할 수도 없다.
천국이나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지나치게 목적지를 의식하면 이에 이르는 과정은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수단은 하나의 노역이며 행복이 깃들기 어렵다.
따라서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고 목적지 도달여부는 신의 뜻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실제로 생각을 달리하면 과정도 수많은 작은 목적지들의 결합이다.

#  깨달음이 있어도 그로 인하여 행복하지 않다면 의미가 없다.
어렵게 깨달아 불행해진다면 깨닫는 고통을 감내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미망상태에서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사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인생에 대한 긍정적 승화가 필요하다.

행복은 작은 데에, 그리고 가까운 데에 있다.
큰 곳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일평생 찾지 못한다.
결국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시력조차 상실하게 된다.

 

허상을 쫒다가 실상을 잃게 된다.


야망이나 성취가 사람의 인격을 넘어서면 비극이다.

그러한 사람을 종종 본다.

측은하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타인이 인정해 주는 행복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타인을 바라보는 삶이고, 결국 노예적 삶이다.
타인이 인정하는 행복은 대부분 유행과 같이 수시로 변한다.
신기루에 불과하다.
행복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은 대부분 행복의 노예다.
지향하는 행복의 수준이 너무 높아 이에 도달하기 위해 평생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
그러나 생전에 이에 도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는 불만족스럽고 불행한 삶이다.
결국 불확실한 내세에 의존하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여야 한다.
이것이 행복의 전제조건이다.

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면 결국 불행하게 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행복에 관한 시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둘째는 행복에 관한 시각 자체를 변경시켜 현 상태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첫째 방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지만, 경쟁이 극심하여 행복이 보장되기 어렵다.
둘째 방법은 인문학이나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경쟁없이 누구나 추구할 수 있는 길이다.
현대문명의 문제는 후자의 방법으로 해결책을 모색할 일이다.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행복의 상황이 속히 종료되기 때문이 아니라 행복을 감지하는 감각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불행도 동일하다.
이는 다행한 일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오늘도 계속되는 것이다.

 

#  "진정한 행복은 희열, 담소,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비애 속에서 견고성과 지조를 지킬 때이다."
(키케로)

행복은 불행에서도 올 수 있다.
온갖 어려움을 뚫고 불행을 극복한 경우,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길을 헤매다 만고 끝에 길을 찾고 희열을 느낀다.
그렇지 않았으면 느끼지 못했을 행복이다.
마치 어린 시절 보물찾기에 성공했을 때의 기분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목표달성이나 역경 극복에서 오는 성취감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다고 한다.

이루지 못한 과거의 행복을 미래에서 찾으려 한다면 과거와 미래 모두 불행하게 된다.
행복이 각기 다르다.
오늘의 행복을 추구할 일이다.

가진 것을 다 주어도 행복하지 않을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능력 밖에 있는 것이다.
행복은 가진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진 것에 만족하는가 여부에 달려있다.

자신이 행복하여야 타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타인을 행복하게 해 주면 자신의 행복도 배가될 수 있다.
이것이 건전한 사회의 모습이다.

행복이나 불행은 강한 전염력이 있다.
행복하려면 행복한 사람들과 가까이 할 일이다.
그러나 불행한 사람을 두고 진정으로 행복할 수는 없다.
행복이 지속되려면 불행한 사람들을 행복의 대열에 합류시켜야 한다.
이것이 사회나 국가의 책무다.

불행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결코 길게 지속되지 않으며 속히 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하여 확신할 수 있다.
비록 오래 지속되어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력이 생겨 그런대로 견딜만하게 된다.
불행이 더 지속되면 이를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인생은 갖가지 역경 속에서 오늘도 지속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불행은 욕심과 관련이 있다.
악마는 낚시를 드리우고 욕심이 많은 사람들을 유인한다.
오래지 않아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낚시를 물고 발버둥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갑자기 인생에 짙은 어둠이 내린다.
악마의 승리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낚시꾼이 대어를 낚은 것처럼.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 이를 지긋이 바라보며 행복에 잠기는 사람.
이러한 시공간이 천국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은 결코 대단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은 너무 바쁘게 살아가면서 이러한 천국에서 추방당하였다.
이제는 꽃도 새도 하늘의 별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행복의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한 행복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2025.3.26.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