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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자유

주라필 2024. 11. 28. 19:57

#  ''나에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패트릭 헨리)

자유가 없으면 노예와 같은 삶이다.

삶의 의미가 없다.

그러한 나라가 많다.

자유 없는 삶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부모세대가 경험한 것에 무심한 세대는 동일한 경험을 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켜켜이 껴입은 옷들이 점점 불편해 진다.
인생은 너무 가식적이다.
노자가 공자의 '예'를 비판한 심정이 이해된다.
뱀이 옷을 벗듯이 하나하나 벗어 던지고 싶다.
어린 시절의 배내옷이 나올 때까지.

인간은 사회적 새장에 너무 길들여져 창공으로 비상할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
심지어 새장이 열려져 있어도 날아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의 개성이 너무 상실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조상이 원래 대자연을 누비던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랑이 과다하면 일종의 속박이 된다.
어설픈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 착각한다.
그러한 착각이 심하면 상대를 속박하는 것이며, 결국 불행한 사태에 직면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사랑 자체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이념에 대한 집착은 자유를 위축시킨다.
다른 길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며, 탈출구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다른 판단을 일체 거부하는 것이다.
자신의 판단이 유일무이한 진리라는 확신이다.

실제로는 이념에 속박된 것이다.
이 경우 파멸은 시간문제다.

생명 재산 명예 등 모든 것을 마치 신으로부터 잠시 빌린 것처럼 살자.

그러다가 돌려달라면 아쉬움 없이 모두 돌려주자.
이러한 자가 진정 자유인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정 자유롭다.
손과 마음에 움켜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자유를 대체할 수 있는 존재인가.
이를 과감하게 저 멀리 창공으로 던져버려라.
그러면 자유롭게 되리라.

자신이 눈치를 보는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한 지배자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눈치를 보는 이유를 분석해 보고, 그것이 욕심에 기인한 것이라면 과감하게 이를 버릴 필요가 있다.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생존방식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으며, 그 때까지는 인내해야 한다.
생존이 있어야 자유도 있는 것이므로.

#  "자유는 곧 책임을 뜻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 한다."

(버나드 쇼)

 

자유는 사회를 전제한다.

따라서 무제한일 수 없다.

과도한 자유는 탈선을 부른다.

인간은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통제장치는 사회만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방종은 인간 자신의 육체와 영혼 모두에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자유롭다."  (스코트)

사상의 자유는 머릿속에 있는 동안에는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상이 외부로 표출되는 경우에는 일정한 제한이 가해져야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나 국가의 존재나 안전에 위협을 초래하는 사상의 표출은 절대적 자유일 수는 없다.
사회나 국가의 존립이나 타인의 자유도 소중한 것이다.

익명으로 살아가면 자유로울 수는 있지만, 부도덕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많아진다.
이름과 이에 기초한 명예가 부도덕으로 가는 길목을 상당 부분 막아준다.
익명으로 인터넷에 부도덕하거나 허위의 글을 거리낌 없이 올리는 사람이 있다.

군중에 휩쓸려 폭력행위를 일삼는 사람들도 있다.

익명의 폐해다.

자유는 건전한 양심과 책임을 전제한다.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행위에 대한 통제는 합리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 책무다.
일정한 나이가 되거나 일정한 직책을 맡게 되면 이에 걸맞은 책임을 부담하여야 한다.
이것이 사회나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다.

사회나 국가는 그 구성원들이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을 전제로 존립한다.


정의를 위한 투쟁은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서 느끼는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타인의 고통은 그렇게 절실한 문제는 아니다.
억압된 상황에서 일단 자유를 획득한 사람은 이를 수호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타인의 자유 주장을 억압한다.
불평등한 상황에서 평등을 획득한 사람은 이를 수호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타인의 평등 주장을 억압한다.

이러한 이기심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비난할 것은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생존본능과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웅이 아니다.
불행하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를 극복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자유와 평등은 반대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자유는 타인과의 경쟁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 선호하고, 평등은 자유의 장에서 낙오하는 사람들이 선호한다.
그러나 평등 없는 자유나 자유 없는 평등을 고집할 경우 그 사회는 공멸할 수밖에 없다.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자유로부터 도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유 그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자유의 결과로 초래된 심리적 공허 내지 인생무상의 공포로부터 도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결과라 할 수 있다.
자유가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을 공허하게 해 기댈 곳을 찾게 된 것이다.
자유를 지향하더라도 그 상태가 지속되려면 삶이 경건하고 목표의식이 뚜렷하여야 한다.

지위가 높아지면 행동이 자유스럽지 않다.
각별히 몸조심을 해야 한다.
노예의 상태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일종의 공복이다.
이것이 정상적이고 안전한 상태다.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자유를 확장하려 하면 결국 높은 곳에서 추락하고 만다.
정치인들 중 이러한 운명에 처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도 단 한 가지는 빼앗을 수 없다.

인간의 마지막 자유, 즉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태도와 방식을 선택할 자유가 그것이다."

(오그 만디노)

 

(2025.4.2.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