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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어린시절

주라필 2024. 12. 1. 08:40

#  산골마을에 살던 나의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나를 나무 밑 밭두렁에 눕히고
밭을 매셨다 한다.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이고
뻐꾸기는 뻐꾹 뻐꾹 울었을 것이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갔을 것이다.
저녁에는 노을이 붉게 물들고ᆢ

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렀지만
지금도 그 시절이 나의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이러한 시간들이 나의 심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 나의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밭농사를 지었다.
겨울에는 밭에 커다란 비닐하우스 몇 동을 지어 채소를 가꾸었다.
엄동설한에도 비닐하우스 내부에서 채소들이 파릇파릇 자라는 모습은 신비로웠다.
향긋한 풀냄새와 흙냄새가 콧가에 맴돌았다.
비닐하우스가 우리 가족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자연은 결코 너그럽지만은 않았다.
한 밤중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날이면 비닐하우스의 비닐이 벗겨져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 높이 미친듯이 펄럭이곤 하였다.
그 소리는 온 동네에 요란하게 퍼져나갔다.

비닐이 벗겨지면 그동안 정성을 다해 기르던 채소들이 모두 동사하는 비참한 상황이 된다는 것을 뜻하였다.

그리고 우리 가정의 어려운 경제사정이 피부에 와 닿게 된다는 것을 뜻하였다.

우리 가족은 모두 잠을 자다가 일어나 삽을 들고 밭으로 뛰어갔다.
혹한 속에서 미친듯이 펄럭이는 비닐을 잡아당겨 비닐하우스에 다시 씌우려고 필사의 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난폭한 바람은 우리 가족의 노력이 성공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느새 비닐은 발기발기 찢어져 비명소리를 지르며 펄럭였다.
이런 때에는 나의 가슴도 찢어지는 듯 하였다.
이쯤 되면 우리 가족은 대자연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을 인정하고 패잔병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귀를 막고 잠을 청해보지만 비닐과 채소들의 비명소리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지만 지금도 찬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불안스레 그 시절을 회상한다.

#  경기북부지방변호사회 고양지회에 '늘산애'라는 등산 동호회가 있는데, 이번에 고봉산에 다녀왔다.
등산로에서 산토끼를 만났다.
털이 얼룩덜룩한 문양이었는데,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워 이를 나의 영혼과 동영상에 담았다.

등산로에서 차를 파는 여인은,  '어느 날 이 곳으로 새끼 산토끼 세마리가 왔기에 먹이를 주곤 하였다, 수컷 한 마리에 암컷 두 마리였다,  그런데 크게 자라니 잘 오지 않는다, 이들이 낳았다고 생각되는 새끼 산토끼를 산에서 보았다는 말은 들었으나 아직 보지는 못했다'고 하였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 토끼를 키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이것이 나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죽음과 죄의식의 문제였다.

* * * *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교문 앞에서 토끼 두 마리를 샀다.
하얀 토끼였고, 아주 귀여웠다.
정부의 저축 장려책으로 코묻은 돈을 저축하였었는데, 졸업을 앞두고 이를 돌려받은 것이다.
내 돈이므로 부모님께 허락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꾸중을 들은 기억은 없다.

나의 토끼였고, 아주 자랑스러웠다.
토끼장은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셨다.
두 귀를 쫑긋거리고, 토끼풀을 오물거리며 아작아작 씹어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주 행복했다.
밖에서 친구들과 뛰어 놀다가도 토끼들이 걱정되어 집으로 뛰어 가 살펴보기도 했다.

그러나 토끼는 장난감과는 다른 것이었다.
수시로 먹이를 주고 똥도 쳐 주어야 하였다.
나는 토끼풀을 뜯으러 다녔고, 토끼를 안고 토끼풀이 많이 자라는 산으로 가서 먹이기도 하였다.
토끼를 안고 갈 때는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어린 동생과 토끼 한 마리씩 안고 토끼풀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토끼풀이 있는 곳에서 동생이 토끼를 떨어뜨렸다.
아마도 동생이 안고 있는 토끼가 풀을 먹으려고 꿈틀거렸을 것이다.

떨어진 토끼는 잘 다니지 못하였다.
그래서 안아 보니 뒷다리 일부가 흔들거렸다.
뼈 중간이 부러진 것이다.

나는 슬피 울었다.
그러나 동생을 나무랄 상황은 아니었다.
동생은 아주 어렸고, 더구나 얼굴에 미안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고 묶어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상당히 어설펐을 것이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나  부목을 제거했는데, 다행히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죄의식으로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산과 들에는 토끼가 먹을 풀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황량하였다.
겨울을 대비하여 풀을 뜯어 말려 두었어야 하는데, 그러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다행히 부모님이 비닐하우스에 채소를 가꾸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어렵게 겨울이 지나고 봄의 문턱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의 생일이 3월 중순인데, 매년 그 즈음이 되면 계절의 전환점이어서 바람이 자주 불고 스산하여 몸이 움추러들곤 한다.
그래서 나의 운명과 비슷하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나의 생일 전날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습관처럼  토끼장을 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너무 조용하였다.
토끼장을 흔들고 툭툭 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죽은 것이다.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니 가족들이 내 눈치만 살폈다.
나는 모르는 척 하고 책가방을 내려 놓았다.
마음이 한없이 어두웠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같은 날 두 마리가 모두 죽다니.
하필이면 나의 생일 전날에.

나의 마음을 뒤덮은 것은 슬픔이 아니라 죄의식이었다.
스산한 날씨를 내가 싫어하듯 토끼도 싫어할 것이므로 바람막이를 해 주었어야 하는데ᆢ
먹이도 충분히 주었어야 하는데ᆢ

나의 생일 아침상에 토끼 고기가 요리되어 올라왔다.
가족들에게는 토끼가 가축이었고, 당시 가난하였기 때문에 기르던 가축이 죽으면 상에 올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토끼가 가축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너무 어려 왜 먹지 못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물론 묻는 사람도 없었다.
이로써 나의 어린 시절은 거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생의 얼굴을 힐끗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딸이 말하였다.
아빠, 눈이 촉촉해졌네 ᆢ

#  생활이 어려웠던 어린 시절,  농촌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이런 저런 부업을 하였다.
직업 기회가 거의 없었던 당시 조금이나마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도 이쑤시개를 통에 넣는 부업을 한 때가 있었다.
이쑤시개를 통에 가득 넣으면 그 통의 갯수에 따라 수수료를 얼마씩 받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어두침침한 불빛 아래 어머니와 나는 열심히 통에 이쑤시개를 넣었다.
오로지 통의 갯수에만 신경을 썼다.

이를 바라보던 어린 조카딸도 참여하였다.
이쑤시개 중 부러진 것 등 문제있는 것들은 버리고 제대로 된 것만 통에 가득 넣었다.

이러한 손녀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네가 옳다'고 하셨다.
나는 갑자기 부끄러웠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렀지만 지금도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그 시절이 그립다.

#  어스름한 저녁 툇마루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다듬이 방망이 소리.
박자가 있고 여운이 있다.
밀려갔다 밀려온다.
바닷가의 파도처럼.
담을 넘고 들을 지나 오솔길까지.

세월이 흐르고 흘렀지만
아직도 귀에 아련하다.
갑자기 눈물이 어린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  어머니는 96세인 2025.2.에 타계하셨다.

아버지보다 40년 정도 더 사신 것이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후회되는 일이 많다.

너무 많다.

 

묘비명은 이렇다.

"이 곳 선영에 두 분 모시오니

자손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 지켜보소서"

 

어느덧 종심(從心)의 나이가 되었다.

공자님에 의하면 '뜻대로 해도 어긋나지 않는 나이'에 달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뜻대로 하면 큰 일 나는' 수준에 불과하다.

언제 공자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인격을 갖추게 될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