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용서
#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신들이 무슨 행위를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누가복음 23:34)
예수님이 사람들의 무고로 십자가에 못박혀 극도의 육체적 고통을 받고, 갖가지 모욕과 핍박으로 극도의 정신적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 기도다.
'인간은 한없이 부족한 존재이지만 그 책임을 오로지 인간에게만 돌릴 수 없다'는 종교적 철학적 정신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거의 태어난대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것이 그 사람의 책임은 아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접할 때 문득 위 성경구절이 떠올라 평상심을 되찾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사람은 어쩌면 불쌍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닌데 운명적으로 그렇게 태어나 평생 타인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요즈음 그러한 사람을 보면 한 편으로는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그런데 육체적 불완전 상태는 연민의 대상이 되지만, 정신적 불완전 상태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육체적 불완전 상태는 눈에 보이므로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지만, 정신적 불완전 상태는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악의'와 연관을 지으며 미워한다.
즉, '고의'로 해를 입히기 위해 그러한 언행을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도 유전적 또는 환경적으로 형성됨으로 인하여 운명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인 경우가 많다.
일종의 정신적 영혼적 장애상태다.
따라서 애초에 비난할 문제가 아니거나 비난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 육체적 불완전 상태에 처한 사람을 보면 어떻게 도울 것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정신적 불완전 상태에 처한 사람에게도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신적 불완전 상태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중증 환자라고 생각하자.
이러한 마음을 가지면 어떤 성격의 사람을 만나더라도 평화로울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노력을 하는데도 여의치 않으면, 자신의 지혜나 인내력 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속히 다른 대안을 강구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기 자신도 상당히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가.
수시로 잘못된 인생길로 접어들어 후회를 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옳다고 생각하고 목소리를 높이던 것들이 나중에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러한 때에 타인의 용서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보험 역할을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용서는 자신의 마음을 치료하고 강하게 한다.
과거라는 감옥에 갖힌 자신의 마음을 석방시키는 것이다.
용서는 일반적으로 잘못이 없는 사람이 잘못한 사람에게 하는 은총이다.
그런데 자신도 수없이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다면 용서는 당연한 것이지 은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상대방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먼저 용서를 구하라.
즉시 분명하게 잘못을 인정하라.
상대방의 반성이나 용서 여부는 상대방의 몫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억울하면 그만두어라.
진심이나 철학의 뒷받침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간에게도 다른 짐승과 같이 피흘리며 물어 뜯는 생존투쟁의 시기가 있었다.
이것이 DNA에 각인되었다.
이러한 모습이 문명화된 현대에도 이따금 표출된다.
문명화된 기간이 그 이전의 기간에 비해 극히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여야 이따금 표출되는 인간의 짐승같은 행위를 이해할 수 있다.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행위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용서하자.
비록 정의가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고 끊임없이 돌고 돈다.
긴 안목으로 바라보면 정의는 결국 성취된다.
"한없는 부드러움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의 천성이자 재산이다." (존 러스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