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진리
# 강한 신념은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니체)
인간이 진리를 탐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진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인간 능력의 한계다.
진리를 확신하는 순간 진리탐구는 중단되고, 오만해지며, 타인의 진리탐구까지 억압하게 된다.
그 확신이 크면 클수록 더 큰 해악이 된다
항상 겸손할 일이다.
진리는 힘이나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어떠한 비판도 잠재울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사람들 뿐 아니라, 미래의 사람들의 비판까지도.
신의 비판까지도.
비판을 두려워하고 제한한다면 진리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간주할 수 있다.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없으면 어떠한 진리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리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는 경우도 동일하다.
진리 이해능력 계발과 진리탐구가 인생의 의미이자 소명일 수도 있다.
"인생은 길고도 고된 진리탐구 과정이다." (간디)
인간이 인식하는 진리는 완벽하지않다.
단지 완벽을 추구할 뿐이다.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확신하는 진리라도 너무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된다.
명백한 거짓은 진리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교묘하게 진리의 탈을 쓴 것이 해를 끼친다.
당연히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도 항상 검토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판사는 이성에 반하는 판결을 선고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증거에 입각한 판결은 정의를 왜곡시키기도 한다.
인간과 제도의 한계다.
따라서 판결을 진리나 진실로 확신하여서는 안된다.
판결을 진리나 진실이라 외치며 악을 은폐하는 도구로 사용하는경우도 있다.
이 경우 양심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진리추구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권위와 자기확신이다.
권위는 일종의 사회적 확신이다.
확신을 하면 눈과 귀가 닫힌다.
다른 의견이 눈과 귀를 통과할 수 없다.
'정의나 국민의 뜻을 자주 들먹이는 사람은 악의를 은폐하는 자'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진리는 자명하기 때문이다.
정치인 중에서 그러한 사람들이 많다.
# "조국을 위해서라도 진리를 아끼는 마음과 지성의 정직함마저 버려서는 안된다."
(헤르만 헤세)
진리는 단 하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진리인지 여부를 누가 어떤 방법으로 확정할 것인가.
사회적 합의에 따라 진리여부를 확정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였다고 하더라도 완전하지는 않다.
인류에게 통용되는 진리는 확률의 문제다.
진리일 가능성이 가장 많다고 생각되는 것을 진리의 자리에 앉히고 숭배하는 것이다.
인간은 완전한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
역사상 진리가 수차 변경되어 온 사실을 마음깊이 되새겨야야 한다.
이러한 점을 진심으로 인식하여야 오만에 빠지지 않게 된다.
진리가 무엇인지 여부에 관하여 결론 없이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다.
삶의 기본적 잣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 건전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진리를 확정하되, 그것이 진리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인내를 가지고 다른 의견들을 경청하고, 이러한 의견들의 입장에서도 진리를 재점토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일단 사회적 합의에 의해 확정된 진리를 존중하여야 한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의견이 진리라는 점을 밝혀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의견을 확신하는 사람이 가장 두렵다.
그 의견을 관철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진리의 수호자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로 진리나 어떤 가치를 조금도 좋게 또는 나쁘게 변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타인의 말에 과도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도 진리는 진리다.
세계는 진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진리라는 골조에 갖가지 요소들이 부가되어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진리는 복잡한 세계의 운행에 있어 질서 유지자다.
그러나 진리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너무 무미건조하다.
진리 이외의 요소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누가 말했는지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그것이 문제다.
진리는 발견한 것이지 창조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그 자체로 진리다.
# '' 죽음을 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악을 면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오.
악은 죽음보다 빨리, 순식간에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지요.
나는 늙어 몸의 움직임이 둔해져 이렇게 죽음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버렸소.
그러나 나에게 사형을 선고한 당신들은, 아직 젊고 몸도 가볍지만, 죽음보다 더 빠른 악에 사로잡혀 버렸소.
나는 당신들의 선고에 의해 죽음에 사로잡혀 버렸지만, 나에게 선고를 내린 당신들은 진리의 선고에 의해 악과 오욕에 사로잡힌 것이오.
ㅡㅡㅡ
나를 심판한 사람들의 의도가 나에게 악을 행하는 것이었다 해도, 나는 그들은 물론 나를 고발한 사람들에게도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오.
자, 이제 헤어질 시간이 왔소.
나는 죽기 위해 가고, 당신들은 살기 위해 가고.
우리 중 누가 더 행복할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오.''
(소크라테스의 변명)
기원전 4세기에 소크라테스가 무고에 의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판사들에게 한 말을 플라톤이 정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에 계시된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르치는 동시에, 그 시대의 사회생활의 기초를 이루고 있던 거짓 가르침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신성한 것으로 인정해 왔던 기성질서를 부정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도피하지 않고, 아테네 사람들에게 왜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으며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해도 똑같은 행동을 계속할 것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밝혀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도피할 수도 있었지만 진리를 위해 독배를 들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후세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로 인하여 인간세상이 한층 품위있게 변모될 수 있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구축한 예지의 세계에서 거닐면 지적 희열을 느끼게 되며, 그 세계에 감히 조그만 벽돌 한 장 덧붙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너자신을 알라고 하였지만 나는 나 자신을 아직 알지 못한다.
단지 현재의 막연한 관념적인 상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에 쓴 글을 통하여 나의 일부분을 알 수 있지만, 생각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그것이 현재의 나의 모습이라 단정할 수 없다.
결국 나는 나의 본모습을 알지 못한 채 하늘나라에 갈 것 같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인생을 알겠는가.
소크라테스가 임종할 때 '어떻게 묻어줄까'라고 친구 크리톤이 묻자 '자네 마음대로 하게'라고 대답하였다.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그에게 있어 육체는 그동안 입고 있던 헌 옷에 불과한 것이었다.
영혼에 비하여 지나치게 육체를 소중히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 "논쟁은 진리를 명확히 밝히기보다는 오히려 애매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진리는 고독 속에서 성장한다.
그것이 성장하면 논쟁이 없이도 받아들여질 만큼 명확해진다."
(톨스토이)
"진정한 예지는 인생에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진리를 아는 것이다." (톨스토이)
"인간의 정신은 진리에 복종할 때에만 자비롭고 고귀하다.
진리에 대한 경외심을 버리는 순간 정신은 악마의 요소를 잉태하게 된다." (헤르만 헤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