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술
#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밭두렁에 걸터앉아 땀과 흙이 뒤범벅 된 손으로 한 사발 가득 막걸리를 마신다.
막걸리의 텁텁한 맛은 인생과 같다.
그 시절의 젊음과 건강과 낭만이 아쉽다.
이러한 것들이 결여되면 술을 마실 자격이 상실된다.
자격이 상실된 지 이미 오래다.
술은 일시적으로 영혼을 물들인다.
세상이 달리 보인다.
마치 분홍색 안경을 쓴 것처럼.
그러한 세상이 그리워 계속 술을 마시면 결국 그러한 세상으로 떠나게 된다.
간절한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다.
술은 인습과 도덕과 양심의 굴레에서 인간을 잠시 해방시킨다.
술에 취하면 감성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이성이 마비된다.
가슴깊이 숨겨있던 잠재의식이 표출된다.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아지며 울고 웃는다.
술을 마시지 않는사람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다.
이것이 그 사람의 실제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인습과 도덕과 양심에 의해 웅크리고 있다가 모처럼 해방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진실한 모습일 수도 있다.
술은 다른 음식과는 달리 영혼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담배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알콜이 육체에 흡수되어 이것이 영혼에도 영향을미치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시적 해방을 갈구하는 영혼이 알콜을 마시게 된 것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술에 취한 사람이 거듭 되뇌인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한 시간은 지속되었을 것이다.
뿌리 깊은 원망.
술에 취한 사람이 울고 웃는다.
얼마나 억압되어 온 영혼인가.
얼마나 가식적이고 고통스런 삶이었나.
제사에도 술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내세에도 술이 필요한 모양이다.
종교의식에도 술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신의 세계에도 술이 필요한 모양이다.
술의 세계는 내세나 신의 세계에 한층 가까이에 있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술이 없다면 행복도 불행도 절반 정도씩 줄어들 것이다.
무미건조한 삶이 지속되다가 모처럼 술로 인하여 얼마나 화기애애하게 되는가.
평온하게 살아가다가 술로 인하여 얼마나 인생이 어둠에 휩싸이는가.
술은 인생무상을 잠시 잊게 하기 위한 신의 깊은 배려다.
그러나 술에 취해 자유의지를 상실하면 불행이 온다.
술을 마실 때는 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존재여부를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
피천득의 아내는 남편이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에 다하여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하였다 한다.
피천득의 수필에 나오는 말이니 믿어도 될 것 같다.
이를 실천하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 범죄를 처벌하려면 어떤 행위에 관하여 법률에 정해진 일정한 요건을 구비해야 한다.
술에 취해 저질러진 범죄를 고의범과 동일하게 처벌하는 것은 형법상 책임성을 부인하는 처사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의 행위를 처벌하려면 마약과 같이 술의 제조나 음주행위 자체를 금하는 법률이 존재하여야 한다.
술을 마시면 취하게 되고 취하면 정상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하면 알콜중독자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국가가 세금까지 부과하면서 술의 판매를 조장하고 있다.
나라 곳곳에 허가를 받은 술집이 즐비하다.
그러면서도 술에 만취하여 초래된 범죄에 관하여 비난하면서 일반 고의범과 동일하게 처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처벌하려면 입법자를 포함한 위정자 모두가 방조범으로 처벌되어야 한다.
술이 과하면 정신이 피폐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술은 마약과 같은 존재로 변한다.
이러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술을 존치시키고 있는 국가는 알콜중독 상태에 빠진 사람에 대한 대책을 세울 의무가 있다.
알콜중독자에 관하여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원망만 하여서는 안된다.
중병에 걸린 사람과 같이 연민을 가지고 치료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정신적 질병이나 정신적 장애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불합리하다.
'알콜중독자가 스스로 알콜중독 상태가 되었으며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이러한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알콜중독은 명백히 정신적 질병이며, 스스로는 그 상태에서 거의 탈출하지 못한다.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없으면 알콜중독자는 점점 폐인이 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사회의 짐은 더욱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