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머리
# 요즘 머리카락에 자유를 주었다.
너무 인위적으로 머리에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 나아가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서양 정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인위적이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의 생명체들은 태어난대로의 개성과 모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인간은 무슨 이유로 머리가 단정하지 않으면 마치 하등동물 대하듯 하는가?
하기는 나도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동안 머리가 상당히 길게 자랐다.
내가 상당한 곱슬머리라는 사실은 요즘에야 알게 되었다.
머리가 상당히 길게 자란 다음에야 곱슬머리 성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동안 길게 자라기 전에 이발을 하여왔기 때에 곱슬머리 상황을 모르고 지내온 것이다.
직업상 골치아픈 사건들을 많이 처리하면서 머리카락도 변형된 것이 아닐까.
그럴만도 하지.
천성과 다르게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왔으니!
풀리지 않는 사건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살아왔으니!
요즈음 무의식적으로 거울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머리형태를 감상하는 것이다.
신의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모두 개성적이다.
둥글게 굽어진 것들도 있고 예각으로 급격히 꺾어진 것들도 있다.
너무 파격적인 것들도 있다.
잡초와 닮은 점이 있다.
조금 질서있게 하려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소원대로 몇 가닥에 사형을 선고했더니 머리형태가 이상해졌다.
할 수 없이 이제는 개성을 존중하기로 하였다.
문득 고등하교 시절 교과서에 게재되었던 피천득의 '수필'이란 글이 머리에 떠오른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그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균형을 중시한다.
미용사도 고객 머리의 좌우 대칭에 신경을 쓴다.
대칭이 아니면, 이를 바로잡기 위해 상당히 노력을 한다.
고객도 신경을 쓴다.
그런데 '왜 좌우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가'하는 근본적 의문을 갖게 된다.
안정감은 생각하기 나름이 아닌가.
어느 한 쪽이 파격적이라도, 예술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 나를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의 머리를 쳐다보며 웃는다.
범생으로만 살아온 모습과 너무 이질적이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웃음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인슈타인 같다는 사람도 있고 베토벤 같다는 사람도 있다.
나와 같은 곱슬머리라면 자기도 머리를 기르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외교적 표현이겠지만, 사실이라 생각하며 나도 빙그레 웃는다.
그러나 솔직히 아인슈타인이나 베토벤은 외양상 그리 멋있는 사람은 아니다.
따라서 그들과 같다는 것은 머리가 자유스롭다는 표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극단적으로는 멋이 없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외교적 표현으로서는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제7대 제임스 본드로 애런 존슨이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의 사진을 보니 나의 현재의 머리상태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하였다가 호되게 면박을 받았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감히 그와 비교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일 것이다.
많은 세월 변호사로서 갈고 닦은 설득력을 발휘하여 '머리형태만 그렇다는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구차한' 변론을 해도 막무가내다.
젊은 사람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인정하지만
그래도 섭섭한 것을 어찌하랴.
믿을 사람 하나 없구나!
외교적 화법도 쓰지 못하나?
예술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없다니!
이렇게 나는 소위 어르신의 길로 접어든 것일까.
가려고 생각지도 않았던 길을 태연히 걸어가고 있으니!
(2025.4.23.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