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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감정, 화

주라필 2024. 12. 26. 09:48

#  "슬픔은 우리 모두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에머슨)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로인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너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라.

그러면 심연도 너를 응시할 것이다."  (니체)

 

감정을 비축해 놓자.
행복할 때에는 미래의 슬픔에 좌절하지 않기 위해.
슬플 때에는 미래의 행복에 오만하지 않기 위해.

비판이나 비난을 감정의 동요없이 수용하는 사람은 정신수양이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면 아주 무서운 사람이다.

나는 아직 그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슬픈가.
그러면 미친 듯이 춤을 추어라.
슬픔이 먼지처럼 떨어져 나갈 때까지.

가장 저항하기 어려운 것이 감정이다.
감정은 이성이 도착하기 전에 인간 전체를 점령해 버린다.
이성이 도착할 때에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 이성으로 변화시킬 여지가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슬픔 뿐 아니라 분노도 나약함에서 온다.

나약함을 숨기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

 

"대다수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고통이나 충격에는 태연하고, 대수롭지 않은 방해나 자극, 사소한 모욕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를 정신병이라 진단한다."

(헤르만 헤세)


감정이나 감성은 태초부터 동물에게 있어 자기보호 방법으로 체화되어 본능화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즉각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 작용이 워낙 강력하여 이성이 작용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은 감성에 종속되어 감성이 옳다는 것을 체계화 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감성에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하면 생존본능에 의해 이성은 작동을 멈추고 결국 기능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이런 경우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안이 진리로 여겨지게 된다.
결국 이성이 상실된 비인간적 존재로 추락하는 것이다.

감정은 본능적이고 반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성에 의한 사전통제가 어렵다.
단지 사후적으로 이성에 의해 감정의 외부적 표출을 억제할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 이성의 통제 이전에 감정은 표정이나 행동으로 이미 표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이성은 감정 표출을 반성할 뿐이다.

#  "증오가 내 심장을 채운다면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진다." (로맹 롤랑)

"증오는 인간의 감정 중 가장 파괴적인 감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존경할만한 종교인들도 감성까지 성스럽게 되기는 어려운 듯하다.
인간적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입장에서만 보자면, 신앙이 독실하고 선한 사람의 사망은 천국으로 이사를 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축하할 일이지 슬퍼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성자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변화하기 이전에는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감정적으로는 싫은 것을 이성적으로 억제하여 좋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위선적인 행동인가.
그 행동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면 위선적이라 하여 배척할 것은 아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선한 행동의 상당 부분이 위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신이나 성자의 잣대를 들이대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경우 이 세상의 선한 행동은 대부분 위선으로 평가되어 더욱 축소되고 말 것이다.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득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는 감정을 거스르는 무수한 도전을 극복하여 이것이 습관화 되어야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단계까지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 이전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미움, 쾌락과 고통, 기쁨과 슬픔의 감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무뎌진다.
감정의 파동은 신의 은총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잔잔해진다.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중병에 걸려 사망할 것이다.

흥분하여야 할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고 울어야 할 상황에서 울지 않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극도의 슬픔이나 기쁨은 시간이 흐르면서 가슴 속에서 서서히 분출한다.

 

#   화

 

1.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러한 화나는 일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 원인을 알면, 우리는 결과가 아니라 그 원인에 대해 화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일반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화를 낼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화를 낼만한 이유는 어떻게 발생하였을까.
그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어 발생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소급해 올라가면 나의 뒷모습이 보일지도 모른다.
나의 박수가, 나의 침묵이 그 원인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화와 무관치 않다.
과연 내가 화를 내며 흥분하는 것이 온당한가.
반성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논쟁에는 귀를 기울이되 거기에 끼어들지는 말라.

격앙과 흥분을 경계하라.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노여움이 그 옳은 일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고골리)

 

"마음에서 우러난 일이면 거의 모두 이루어지지만,  

머리에서 나온 것이면 거의 그렇지 않다."  (샤갈)


2.  도덕을 말하는 사람은 대개 위선자다.
(오스카와일드)

정의나 진리를 말하는 사람도 비슷하다.
자신의 이익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화를 낼만한 이유와 무관치 않은 사람이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은 위선적인 것이 아닌가.

3. 사람들이 서로 증오하면서 말다틈을 하고 있으면, 아이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도 모른 채, 양쪽을 비판하면서 슬픈듯이 두 사람에게서 돌아서 버린다.
(톨스토이)

아이는 현명한 판관이다.
신의 사자다.

증오를 제압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고결한 방법은 용서가 아닐까.

4. A로부터 주먹으로 몇 대 맞은 B가 A를 칼로 찌른 경우, A와 B 모두 처벌되어야 한다.
현행 법체계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된다.
이러한 법체계를 무시하며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사적 처벌을 하려 해서는 안된다.

서로 상대방만 비난한다면 옳지 않다.
너무 위선적이다.

A와 B가 싸울 때 어느 한 쪽을 적극적으로 응원하거나 방관한 사람들은 책임이 없는가.
화를 내는 것이 옳은가.

너무 위선적인 것이 아닌가.

 

(2025.3.31.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