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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이성과 감성카테고리 없음 2025. 1. 7. 10:06
# "만일 인간이 진정한 본성을 잃어버린다면, 그때그때 편리한 모든 것이 그의 본성이 된다."
(파스칼)
이 세상에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감동적인 것이 많지 않다.
더구나 나이가 들어가 두근거릴 가슴조차 줄어든다.
하늘나라에 갈 때가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이가 들면 신의 은총으로 어린이 마음을 되찾는 것 같다.
감성은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문이다.
이 때 감성은 외부자극을 흑백으로 가른다.
태초부터의 생존본능에 따라 유불리를 즉각 판단하여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것이다.
그 후 이성이 다시 판단하기는 하지만 감성의 권위에 도전하기는역부족이다.
이성에 대한 감성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열광은 감성의 과도한 분출이며 재난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기쁘거나 슬프면 얼굴에 그 모습이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기쁜 모습이나 슬픈 모습을 하는 경우 어떤가.
이 경우 어느 정도 기쁨이나 슬픔이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표정과 감성은 원초적으로 분화가 제대로 되지 않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선후에 관계 없이 기쁘면 기쁜 표정이 뒤따르고, 기쁜 표정을 하면 기쁜 마음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행복하고 싶으면 행복한 표정을 하고, 용감하고 싶으면 용감한 표정을 하면 된다.
이성이 감성을 선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 피론은 배를 타고 가다 태풍을 만났다.
함께 가던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피론은 그들에게 거기 있던 돼지 한마리를 보여 주었다.
돼지는 그 폭풍우에도 아무 걱정없이 태평하였다.
인간이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는 이성, 그것으로 해서 만물의 영장으로 자처하고 있지만, 그 이성이 겨우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었던가.''
(몽테뉴)얼마 전 중국의 어느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중간에 정지하였다.
그 내부에 11세의 어린이가 혼자 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는 동안 신고를 받고 달려 온 경찰관이 밖에서 어린이를 안심시키려 노력을 하였다.
상당한 시간 후 엘리베이터를 고치고 문을 열자 모두 놀라게 되었다.
그 어린이는 그 엘리베이터 바닥에 앉아 학교의 숙제를 하고 있었다.
공포는 감성의 문제다.
감성이 인간을 점령하면 이성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따라서 몽테뉴의 추론은 정확하다고 보기 어렵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미래 예측력이 상당히 박약하다.
피론의 돼지는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결국 배는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피론의 돼지가 태평하면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이것은 이성의 작용이다.
# 인간은 미래예측력이 상당히 부족함에도 자만심으로 인하여 예측을 기정사실화 한다.
이로써 걱정이나 공포를 증폭시킨다.
오늘 최선을 다하고 미래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감성은 몸의 상태와 외부환경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그러나 이성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성과 감성의 갈등은 인생의 영원한 숙제다.
정신을 집중하려면 목표가 명확하고 시간이 제한되어야 한다.
활이나 총을 쏠 때와 비슷하다.
뛰어난 사람들의 이끌음이 없다면 단독으로 정신적 에베레스트에 오르기는 어렵다.
무수한 현자들의 현명한 생각들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든든한 토대 없이는 탑을 높고 든든하게 쌓을 수 없다.
너무 긴장하면 근육이 굳어진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굳어진 것은 충격을 가하면 파열된다.
종교 문학 예술은 정신의 이완작용을 한다.
지나치게 큰 행운이나 재산은 종종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부패시킨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얻게 되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인간은 완전무결한 상태를 기준으로 하면 모두 크던 작던 일정부분 정신적 장애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정신이나 성격이 성인군자처럼 완벽하다고 단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를 알면서도 쉽게 고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것은 생래적인 것, 즉 본성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면 상당히 중한 정신병적 증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이 잘못된 것이라고 당당하게 항변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 육체가 몸담고 있는 현세와는 완전히 다른 정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내세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육체에 관한 흠에는 대부분 관용을 베푼다.
그런데 정신이나 성격상의 흠에 관해서는 과민반응을 일으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정신이나 성격의 경우 육체와는 달리 신적인 정도까지 고양된 혹은 성자와 같이 완전한 상태를 전제한다.
이렇게 판단기준을 한껏 높여 놓고서 이에 달하지 못할 경우 자기 자신에 관하여서는 너무 관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는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위선적이고 자아도취다.
이러한 이유로 세상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의 신체적 장애에 대해서는 도와줄 준비를 하고 있는 반면 정신적 장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은 크든 작든 일정부분 정신적 장애인들이다.
매일 정상적이지 않은 언행, 즉 정신적 장애를 뼈저리게 느끼며 후회한다.
깨닫지 못하는 장애는 얼마나 많으랴.
인간의 한계다.
자신의 천성과 다른 모습으로 살 것을 강요당하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다.
그 다른 모습이 정상적이라 하더라도.
불평은 일반적으로 인생의 낭비다.
불평을 일삼는 사람이 행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행복에 대해서도 불평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평도 습관이다.
아주 불행한 습관이다.
성격은 대부분 천성이다.
이것이 변화되려면 상당한 노력이나 엄청난 충격이 있어야 한다.
노력으로 성격을 변화시키려면 우선 자신의 성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신의 은총이라 할 수 있다.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신의 성격은 올바르다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