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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때때로 내 삶을 초월한 영혼의 상태를 어렴풋이 느낀 적이 있다.
그 때 영광이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고, 행복이란 것 역시 무슨 소용이 있으랴'' (플로베르)
고요한 밤이나 산림 속을 거닐며 문득 이러한 느낌에 젖어드는 때가 있다.
독서를 하다가 그러한 상태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잠시 차원이 다른 세계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세계에 이르는 것이 종교의 귀착점일 수도 있다.
''별은 나를 꿈꾸게 한다'' (빈센트 반 고흐)
이러한 상태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일산 호수공원에 정지용의 시비가 서 있다.
시에 의해 호수가 나의 영혼에 그리움의 크기와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얼굴 하나야/두 손으로/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호수 만하니/눈 감을밖에"
호수에 비친 자연은 또 다른 세계다.
바람에 잔물결이 어리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신비스러운 세계다.
불현듯 저 세상에서 한없이 걷고싶다.
정지용의 시 '향수'가 떠올라 조용히 읊어본다.
그가 바라본 고향은 나의 어린 시절 고향 모습과 닮았다.
무척 그립다.
그 모습은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졌다.
나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세월이 지나며 점차 빛이 바래지고 있다.
더 지나면 간단한 스케치 모습만 남을 것이다.
하늘나라로 가면 지워질지도 모른다.
# "마음은 천 갈래로 흩어질 수 있지만,이 아름다운 길 위에서 나는 평화롭게 걷는다.
한 걸음마다 바람이 불고.
한 걸음마다 꽃이 핀다." (틱낫한)
"절대로 무엇을 세우지 말고 심어라.
자연은 세운 것을 파괴하나, 심은 것은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정신세계도 동일하다."
(톨스토이)
비가 나리고 천둥이 치며 생명이 약동한다.
뭇 생물들의 환희의 합창이다.
이에 동참한다.
나도 자연의 일원이기에.
드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는 심장을 뒤흔드는 웅장한 음악을 연주한다.
온 우주를 뒤흔드는 천둥을 닮았다.
자연은 인간에게 영감을 준다.
종교, 예술, 문학의 원천이다.
자연은 병든 인간을 치유한다.
눈을 감고 가만히 빗소리를 들으면 혼탁한 영혼이 정화된다.
너무 혼탁하여 아주 오래 들어야 한다.
비가 많이 나린다.
인간의 영혼이 상당히 혼탁한 모양이다.
사회가 제시하는 행복을 정신없이 쫒다가 진정한 행복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인간도 대자연에서 진화하였다.
그런데 점차 생명의 뿌리인 자연에서 이탈하여 고독하고 불안한 삶을 사는 것이다.
자연, 즉 신의 창조물을 바라보며 항상 감탄한다.
인간의 첨단 과학에 의해서도 원소들을 결합하여 잠자리 한 마리도 만들지 못한다.
예술의 영역에서도 인간은 자연에 대한 피상적 모방에 그치는 정도다.이른 봄 뒷산을 바라보며 감탄한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분홍색, 흰색, 연노란색 꽃들과 파아란 새싹들이 동산을 장식한다.
역경을 극복한 존재들의 환희다.
검은 줄기들이 꽃들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여명, 저녁노을, 하늘의 별 및 단풍은 예술의 극치다.
자연에 견주어 보면 인간의 지식이나 예술은 아직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오만은 너무 크다.
단풍ㅡ소명을 이루고 여기 누워
꽃길을 예비했네
차마 밟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바라만 보네
무엇을 하고 여기 누었나 물으면 간단하다
왜 하였나 물으면 어렵다.
인생과 동일하다.
# "피타고라스 학파에는 '아침마다 하늘을 바라보라'는 규칙이 있었다.영원히 동일한 법칙에 따라 동일한 방법으로 자기의 소임을 다하는 천체를 보고,
질서와 순결성과 적나라한 모습을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
우주와 대자연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항상 존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앙드레 지드는, '현자란 세상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자'라 하였다.
정상적인 것 보다는 비정상적인 것이 오히려 각광받고 득세하기도 한다.
오로지 교환가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세상이다.
무엇에 감탄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
자연은 추억의 문을 여는 열쇠다.
나의 추억이 대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축복이다.
대자연을 바라보면 추억의 문이 빠끔히 열리고, 어린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즐거워진다.
도시적 삶에서는 추억이 인공물과 연결된다.
이 세상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신비롭지 않은 것들이 없다.
예술적이거나 음악적인 것들도 많다.
너무 많아 무심히 넘겨 버리게 된다.
자연을 살펴보노라면 미술적이고 음악적인 것들이 영혼에 살며시 스며든다.
자연의 정기는 영혼적이다.
자연은 영혼과 교감을 한다.
신과도 교감을 한다.
신을 만나려면 자연의 품에 안기어야 한다.
마음의 평온을 바라는가.
마음을 활짝 열고 우주와 대자연의 정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울창한 나무 밑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수많은 나뭇잎들이 온 하늘을 뒤덮고 살랑이며 반긴다.
이들은 모두 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
수많은 나뭇잎 중 소외된 것들은 없다.
아주 평등하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마치 해맑은 웃음같다.
그래서 행복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씨앗이 어느 장소에 떨어져 발아가 시작되면,주어진 환경을 고려하여 미래에 완성될 나무 전체의 설계도가 작성되는 것이 아닐까.
그 설계도는 모든 잎들의 평등을 전제하여 작성된 것은 아닐까.
인간에게만 이성이 있다는 것은 오만이 아닐까.
자연은 과학의 원천이다.
인간의 발명의 대부분은 자연에 대한 모방, 즉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을 미시적으로 바라보면 더욱 신비하다.
자연을 단순히 진화론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거듭 깨닫는다.
# "낯선 정적이 감돌았다.새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새들이 먹이를 쪼아먹던 뒷마당은 버림받은 듯 쓸쓸했다.
죽은 듯 고요한 봄이 온 것이다.
ㅡㅡㅡㅡ
미생물이든 인간이든 모든 생명체는 지구에서 생존할 가치와 권리가 있다.
누구라도 힘으로 이것을 밀어내서는 안된다.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면, 자연은 언젠가 인간을 상대로 더 참혹한 전쟁을 벌일 것이다."
(레이철 카슨, 침묵의 봄)
오솔길은 발길을 유혹한다.
자연의 형태와 굴곡을 거의 거스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발자취에 따라 형성된 길이다.
햇볕이 따사롭고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시냇물소리, 풀내음, 꽃향기 등이 어우러진 천국과 같은 길이다.
삶의 애환이 어려있는 일종의 역사다.
오솔길의 풀벌레소리, 나의 영혼을 촉촉히 적시네.
이러한 때이면 나의 발걸음은 점차 느려지다가 멈추게 된다.
자연에 침잠한다.
산길에 굵은 나무 뿌리들이 마치 힘줄처럼 힘차게 뻗어있다.
강한 생명력이다.
산을 오르며 그 정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신다.
행복이 영혼에 스민다.
정원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기 어렵다.
너무 인위적이다.
신의 작품에 인공을 가하여 우스꽝스럽게 변조한다.
특히 서양의 정원이 심하다.
낚시질은 물고기를 속여 생명을 탈취한다.
비난받을 일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그나마 용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희를 위한 것이라면 용납될 수 없고, 신의 의사에도 반한다.
물고기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인간의 유희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아마도 생명체를 유희 목적에 이용하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 의사를 존중한다.
그러나 가능하면 생명체의 희생과 고통을 줄이는 방안을 강구할 일이다.
신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양심의 가책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고향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이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이머니도 있어라
(노천명)
# 황무지
사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일깨운다
지난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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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엘리엇)
(2025.4.23.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