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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는 미소에서 시작된다.'' (마더 테레사)
누구나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뉴스에 의하면 폭행, 살인, 테러, 전쟁 등 온 세상이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다.
대자연은 평화롭게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늘상 살벌한 생존투쟁의 장이 펼쳐진다.
인간사회도, 국제사회도 동일하다.
평화는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다.
인류의 영원한 숙제다.
생존경쟁이 격화되면 누구도 평화로울 수 없다.
따라서 평화를 위해 경쟁의 기본원칙이 필요하다.
경쟁자는 그러한 기본원칙을 지키며 생존경쟁을 하여야 하고, 이러한 원칙을 지키면서 취득한 전리품은 국가권력으로 보호해 준다는 것이 원칙의 기본 골격이라 할 수 있다.일종의 스포츠정신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법률을 제정하여 생존경쟁의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를 기초로 평화가 유지된다.
이러한 법의 탄생 배경을 고려하면 결국 법은 생존경쟁의 승자로서의 지위를 보장하는 면이 강하다.
패자로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시로 법을 무시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세력들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그것도 생존투쟁의 연속이라 할 수 있으므로 불가피한 면이 있다.
평화는 생존경쟁의 승자와 패자의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균형이 깨질 위험이 상존한다.
승자와 패자는 평화를 파기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라 생각되면 이를 실행에 옮긴다.
이 경우 법적 제재가 뒤따른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가 자신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고 손해가 될 수도 있다.
생존투쟁은 혼돈 속에서 진행된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생존경쟁의 승자도 패자의 평화 파기행위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존투쟁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패자의 생존에 일정한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닌가.
기본원칙에 따라 자신의 전리품은 공정하다고 항변해도 현실적으로 패자는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평화라는 이유로 생존경쟁의 패배상태를 영속시키는 상황을 누가 진심으로 승복하겠는가.
패자는 평화라는 이름의 장벽을 깨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게 되는 것이다.
패자가 평화상태에서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라면 평화를 깨더라도 손해될 것이 거의 없다.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승자는 평화가 깨지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잃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승자는 승리에 취해 오만하면 안된다.
지극히 겸손하여야 한다.
자신의 전리품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패자를 감싸 안아야 한다.
자신의 권리로 인정받은 전리품이라도 일부를 떼어 패자에게 나누어 줄 아량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의 장벽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장벽이 무너지면 자신의 전리품에 대한 권리를 모두 잃게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승자는 평화가 장기간 계속되면 변화를 갈망하면서 평화의 가치를 망각한다.
변화 없는 평화보다 평화 없는 변화를 선호하는 사태에 까지 이른다.
이는 전쟁광이나 독재자들에게 악용된다.
로마시대 독재자들은 시민들의 무료함을 무마시키기 위해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들로 하여금 생사의 결투를 하도록 하였고, 사람들을 굶주린 사자우리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검투사나 사자우리에서 목슴을 잃는 사람들은 패자들이고, 이에 환호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승자들이다.
사회가 이런 방식으로 나아가면 평화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패자는 불만만 가져서는 안된다.
생존경쟁의 패자가 된 이유를 냉철히 분석하여 좀 더 분투하여야 한다.
승자도 대부분 각고의 노력 끝에 승리를 한 것이다.
박수를 쳐 줄 아량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그 사회가 발전하고 평화로울 수 있으며, 패자가 승자가 되었을 때 승자로서 존경받을 토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언론에 보도되는 사회 지도층들의 모습은 존경스럽지 않다.
법을 악용하여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하고 권력을 탈취하며 명예까지 얻는다.
이런 경우 법을 깨고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생존경쟁의 패자의 의사를 결집하여 자신의 권력을 증대하려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들은 포퓰리즘 정책을 구사한다.
군중은 이들의 미사여구에 속아 이들을 추종한다.
현대사회에서 포퓰리즘은 군중을 흥분시켜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게 만드는 일종의 마약이다.
독재자는 이러한 마약을 제조하여 권력을 구축한다.
마약은 일단 맛을 들이면 중독되어 끊을 수가 없다.
독재자는 무비판적인 군중을 수족처럼 다루며 권력을 공고히 한다.
포퓰리즘의 기본 구도는 평등의 기치하에 승자로부터 재산, 권력과 명예를 빼앗아 패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패자의 재산 등이 증식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산 등을 빼앗긴 사람은 노력할 의욕을 상실한다.
패자는 독재자로부터 밥을 얻어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밥을 생산할 능력을 상실한다.
그러한 나라의 미래는 암울하다.
이러한 운명에 처한 나라가 상당히 많다.
이러한 나라가 평화로울 수는 없다.
세상은 점차 포퓰리즘의 확산으로 어려운 상황이 될 것 같다.
생존경쟁의 생리상 승자보다 패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평등선거가 정착되었으며, 매스미디어가 광범위하게 확산하여 패자들의 결집이 심화될 것이다.
평등선거 제도는 생존경쟁의 세상에서 특이한 제도다.
권력을 창출함에 있어 모든 국민 각자가 동일한 권한이 있다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다.
이는 생존경쟁이라는 생명체의 기본 구도를 초월하는 제도다.
인간을 인간답게 한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패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에서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기반이기도 하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발생되는 부작용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인류의 과제다.
국제사회는 국가간 국력의 현격한 차이로 인하여 생존경쟁도 국내문제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국제법은 존재해도 실효성이 거의 없이 힘의 논리가 적용된다.
국제문제에 있어서는 오로지 국력신장만이 평화를 유지하는 길인 것 같다.
국내에 있어서는 국민의 투표권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행사되는 한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
국가권력은 투표권에 의해 변경 가능성이 있는 한 국민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국가권력보다 강한 개인은 상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힘의 균형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힘의 균형을 이루기 어렵다.
국내관계와는 다르게 국제관계에서는 모든 국가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강한 조직체를 결성하기 어렵다.
국가간의 힘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에 반하는 사태가 종종 발생한다.
그래도 해결책이 거의 없다.
세계의 지성인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원칙이나 정의를 지나치게 고집하여 평화가 깨지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다.
무엇을 위한 원칙이고 무엇을 위한 정의인가.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원칙과 정의를 세우려고 하더라도 가능하면 평화롭게 해결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다수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들이라 하더라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다수에 의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은 다수자의 이익과 소수자의 희생이 전제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소수자도 이러한 상황에 적응이 되어 반발을 하지 않게 되고, 자신도 다수자에 속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일단 다수자에 속하게 되면 다른 소수자의 희생을 눈감아 버린다.
이러한 곳에서 정의는 실종된다.
결국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익을 위한 투쟁이다.
지구촌이 테러로 인하여 흉흉하다.
가난이나 불평등에 불만을 가진 사람, 계속되는 평화에 지친 사람 등등 테러의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이를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은 '불만'일 것이다.
경쟁적인 사회에서 낙오자는 사회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된다.
이를 우려하여 경쟁을 없애면 사회가 정체되고 오히려 뛰어난 사람이 불만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적절한 균형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재산세, 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등에 관하여 누진률을 높여 부의 편중현상을 줄여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 사회의 총체적인 부가 감소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평화와 사회 구성원의 행복증진을 위해 일정 부분 감수하여야 한다.
권력이나 명예에 관하여서도 편중현상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여야 한다.
동시에 근로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로의욕이 너무 적은 사람들에 대한 대책도 강구하여야 한다.
자포자기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사회적 책무다.
유전자나 환경이 유사한 형제들 사이에도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가 많다.
그 이외의 사람들에 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점을 이해하는 것이 평화의 첫걸음이다.# 잡초가 우거진 숲을 헤치며 나아가듯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현실을 하나씩 극복해 나가는 것이 인생길인 것 같다.
평화롭지 않다고 한탄하며 인생길에서 멈춰 설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주어진 조건하에 끊임없이 다가오는 역경을 극복하며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것이 신의 의지인지도 모른다.
이유 없이 칭얼대는 어린아이를 달래줄 정도의 마음자세를 항상 견지하라.
그러면 어떠한 사람과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도 참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사회나 국가의 중책을 믿고 맡길 것인가.
작은 일에도 파도처럼 마음이 출렁거려 마음의 평화를 잃는다면 득도하였다고 할 수 없다.
인생을 대범하게 살아갈 일이다.
한 번은 죽을 목숨이 아닌가.
여행을 하다 보면 곳곳에 사람들이나 동식물들이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척박한 곳과 비옥한 곳, 험준한 곳과 평탄한 곳, 돌이나 물이 많은 곳과 없는 곳, 좋은 집과 허름한 집 등등 그들이 사는 곳은 상당히 불평등하다.
사사건건 불평등한 문제를 탓한다면 타인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평화로울 수는 없다.
좋은 조건에 있다고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쁜 조건에 있다고 항상 불행한 것도 아닐 것이다.
외부적 조건에 따라 일률적으로 행복여부를 구분지을 수는 없다.
주어진 조건을 일단 받아들이고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 나가되 그 과정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다.
원망할 이유를 찾으면 끝이 없다.
# 완벽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우주나 세상 자체가 완벽하다고 볼 수 없다.
인생도 지극히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앞날을 거의 예측할 수 없다.
완벽은 이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혼란스런 세상에서 완벽을 추구하지만 결국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헤쳐나갈 일이다.
폭력을 일삼는 사람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을 단순히 미워하기만 해서는 폭력을 제거하기 어렵다.
인간의 선천적 또는 후천적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폭력으로 표출된 면도 있기 때문이다.
적법한 경쟁으로는 생존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인간의 이러한 점을 직시하여 해결책을 모색하여야 한다.
합리적인 생각이라도 그것이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 대외적으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매국노로 규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평화의 커다란 장애물이다.
맹목적 애국심은 결국 자국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세상의 갖가지 잡음에 초연할 필요가 있다.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다면 담담한 마음으로 인생길을 계속 걸어갈 일이다.
평화는 힘의 균형상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힘이 지나치게 불균형할 때 강자의 은총에 의한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고, 한계가 있다.
제도화가 필요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정직 때문이니, 굽은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은 요행으로 화를 벗어나는 것이다'' (공자)
이러한 강한 믿음이 사회를 평화롭고 정의롭게 한다.
이러한 믿음이 유지 강화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성인들의 과제다.
우리의 사회와 정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의 실체를 직시할 때 요행으로 화를 면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인류는 이미 멸망하였을 것이다.
정직하게만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인간을 존속시키기 위한 신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신은 요행이라는 노아의 방주를 보내 그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 아닐까.
그나마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뉴스를 보면 세계는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다.
평화롭지 않은 사건들만 모아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들이 얼마나 많으랴.
굳이 평화롭지 않은 일들만 바라보며 세상을 한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에 불화가 만연해 있는 것은 산과 들, 하늘과 별, 푸른 바다를 바라보지 않고 발 밑만 바라보며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자연을 수시로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성찰하라는 것이 신의 의지가 아닐까.
3차원적 인간이 2차원적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눈을 들어 하늘에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광대한 우주의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자.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다.
언론에 행복보다는 불행이, 평화보다는 폭력이 훨씬 많이 보도된다.
이것은 불행이나 폭력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이 경우 오히려 짐승들만 저지를 행위들이 인간도 저지를 수 있는 행위라는 인식을 확고히 하는 것은 아닌가.
인간의 본성이 그리 선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미꾸라지 한 마리가 요동치면 모든 물이 흐려진다.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모든 사람의 말이 의심을 받는다.
이러한 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옛날에는 거짓말을 하면 그래도 부끄러움을 알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아주 떳떳하다.
오히려 큰 소리를 치며 상대방을 공격한다.
적반하장이다.
세상이 흉흉하다.
마치 짐승처럼 타인을 찌르고 물어뜯는 사람도 속출하고 있다.
요행이라는 노아의 방주 승선요건을 좀 더 엄격히 제한하여야 할 것 같다.
이 세상은 비합리적이다.
정의나 진리가 항상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어렵다.
긴 안목이 필요하다.
결국 정의나 진리가 승리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그나마 사회를 지탱해주는 힘이다.
타국을 침략하는 국가가 건재하는 세상은 명백히 불합리하며 정의에 반한다.
국민을 선동하고 오도하여 정치적 이익을 꾀하는 집단이 건재하는 세상도 동일하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보면 결국 정의는 실현될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신의 시간계획을 굳게 믿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과거의 삶에 대한 후회, 타인에 대한 원망, 미래에 대한 욕심이 줄어들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잔물결은 계속되고 있다.
이 세상을 하직할 때에야 완전한 평화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러한 욕망이 삶의 추진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를 대체할 추진력이 필요하다.
종교와 철학이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욕심이나 허영을 줄이는 것이 최상책이다.
욕심이나 허영 때문에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불행하게 되는 예를 너무 많이 보게 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흐리고 개이고 태풍 불고 비가 오는 현상이 사람의 마음에도 일어난다.
자신과 타인의 상태 변화를 이러한 입장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할 일이다.
이것이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다.
마음이 괴로운 사람을 만나면 우선 따뜻하게 감싸주자.
영혼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바다와 같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평화는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다.
지나치게 완전한 평화를 갈구하면 항상 불안정한 심리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불완전한 상태가 오히려 일반적임을 되새기면서 비록 미흡하지만 완전하려 노력하며 묵묵히 인생길을 걸어갈 일이다.